엔터이슈2013. 5. 14. 08:53



진정 누군가를 지켜낸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감히 꺼낼 수 있는 말일까?

특히나 살얼음판과도 같이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은 직장생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흔쾌히 내놓고 다른 누군가의 퇴사를 막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것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잃어야만 가능한 것이 세상이치다. 모두를 취하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자칫 한순간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정한은 정주리를 꼭 지키고 싶었다.

비단 사랑이나 연민이라는 감정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가족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하직원이 이토록 부당한 처분을 당하여 쫓겨나듯 회사에서 떠나는 모습을 도저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정주리를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눈밖에 날 것을 각오하고 황부장의 결정을 철회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회사가 어디 애들 놀이터인가? 한번 결정난 사안이 손바닥 뒤집듯 없던 일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회사라는 조직안에서 무정한이 정주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황부장에게 매달리고 감정에 호소하는 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대로 정주리의 퇴사를 막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이란 것을 잘 알기에 무정한은 멈출 수가 없었다.


미스김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지금의 위기속에서 정주리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무정한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저 아무것도 잃지 않고 또 하나를 얻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정주리를 위해서 팀장의 자리를 내놓을 수 있느냐는 미스김의 질문에 무정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미스김도 마찬가지였다. 정주리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저 코웃음밖에 칠 수 밖에 없었다.

제 아무리 슈퍼갑 계약직으로 회사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인사권을 마음대로 주무를만한 권한이나 힘이 그녀에게 있을리 만무하였다.

대신 미스김은 무정한과 달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목숨과도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기로 한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업무로만 평가를 받으며 아쉬운 소리 하는 법없는 그녀가 웬일인지 자존심을 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유도복을 착용하고 모습을 드러낸 미스김은 영리했다.

사보에 실릴 멋드러진 사진촬영을 위해 모인 장소에서 황부장의 위신을 세워줌과 동시에 정주리의 계약해지를 철회할 수 있는 기가 막힌 신의 한수를 또다시 펼쳐보인 것이다. 


 

 


황부장은 당황스러웠다.

른 사람도 아닌 미스김이 정주리의 계약해지 철회를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 그저 놀랍고 의아할 뿐이었다. 미스김은 사력을 다해 황부장과의 대결에 임하였다. 마음같아서는 대문짝만하게 황부장의 목을 조르고 바닥에 내다 꽂는 사진을 실리게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로지 부당하게 회사에서 내쳐질 위기에 처해있는 정주리를 위해 그리고 아프고 쓰라린 자신의 과거와 떠나간 선배를 위해 기꺼이 자존심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던져 계약해지 철회만 얻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였다.


결국 미스김의 승부사다운 한판 대결로 정주리의 계약해지는 철회되었다.

하지만 미스김은 잠시 잊고 있었다. 회사라는 조직이 어떤 생리구조를 가진 곳이란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던 그녀가 잠시 착각을 했던 것이다. 황부장은 진정 미스김과의 약속을 지킨 것일까?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미스김과 황부장.

약속을 지켜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미스김을 웬일인지 황부장은 모른척 외면했다. 그리고 약속과 감사라는 말을 건네는 그녀를 그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업무능력을 펼쳐보이는 미스김이라고는 하지만 황부장에게 있어서 그녀 역시도 결국 계약직 사원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목이 언제 날아갈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황부장이 계약직 사원과 도대체 무슨 약속을 할 수나 있을까? 오늘보고 내일보고 앞으로 오랜시간 마주할 사이도 아닌데 술내기도 아닌 그런 약속들이 과연 무슨 의미나 있을까?

황부장은 정주리의 계약해지 철회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해 결코 멋쩍거나 애써 쿨한 척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애초부터 약속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맡고 있는 부서가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정주리의 기획안만 수중에 들어오면 그뿐인 것이다. 정주리와 같은 계약직 사원이 회사를 더 다니든 말든 그는 처음부터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미스김은 황부장의 얼굴에서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잠시나마 착각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달콤한 꿈을 꿨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결국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이러한 허탈함과 배신감 뿐이었다. 아무일 없을 거란 회사와 상사의 약속들은 그저 스쳐가는 바람에 불과하였다.

자신의 하나를 버리며 정주리를 지켜내기로 마음먹었지만 결국 미스김마저도 그녀를 지켜낼 수는 없었다.

모두가 기뻐하며 축배의 잔을 올리는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미스김은 지울 수 없는 상처만 오히려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정주리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건져냈지만 그건 그저 잠시뿐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미스김은 지우고 싶었던 아픈 과거의 기억속에서 또다시 방황하며 허우적 거려야만 했다.

그녀의 상처받은 영혼은 과연 누가 따뜻하게 위로하고 치유해 줄 수 있을까?

홀로 음악을 들으며 쓸쓸히 자신의 다친 영혼을 스스로 위로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가슴아프기만 했다.


<사진은 인용을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출처 : KBS2 직장의 신>


Posted by 믹스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