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이슈2013. 4. 23. 09:17



몸살 감기로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며 정신마저 혼미했지만 미스김은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하루쯤은 병가를 내고 쉬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테지만 결근은 죽기보다 싫었기에 그녀는 오늘도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찾아갔다. 하지만 무쇠같아 보였던 그녀도 결국 사람이기에 아픈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모니터가 꺼져있는 줄도 마우스를 거꾸로 잡고 있는 줄도 모를만큼 그녀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정신을 다잡았다. 조금 힘들고 아프다고해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고 결근을 해버린다면 지금까지 자신과 약속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 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셀수도 없을만큼 결근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많을 것이다.

전날 과음을 해서 아니면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몸이 아파서 그리고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하루쯤 무단 결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해본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하기가 어렵지 한번이 두번되고 세번이 되버리면 언젠가는 회사를 때려치든 짤리든간에 집에서 빈둥빈둥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똑같이 몸살을 앓아 갑작스럽게 무단결근을 하게 됐지만 유급으로 처리되는 장규직과는 달리 혼미한 정신을 다잡으며 출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미스김을 통해 마음 편히 병가 한번 내기도 어려운 계약직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서러움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복사기의 고장은 초보계약직 정주리를 너무나 지치고 힘들게 하였다.

지지리 운이 없게도 그녀가 복사기를 사용하던 중에 고장이 나버렸는데, 졸지에 200만원 가까운 수리비를 뒤집어쓰게 생긴 것이다. 물론 그녀가 사용하다가 고장이 나긴 했지만 오랜시간 사용하다보면 기계는 언제든지 고장날 수도 있기에 그녀가 굳이 책임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심초사 계약직 사원으로 맘졸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정주리의 마음은 복사기의 고장으로 더욱 심난하기만 했다. 가뜩이나 지난 일들로 회사에 찍혀버려 언제 회사에서 나가게 될지 모르는 판국에 업무에 꼭 필요한 복사기마저 자신이 사용하던 중 갑자기 고장나버렸으니 가시방석일 수 밖에 없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간에 회사의 업무에 필요한 복사기가 고장나버리자 정주리는 더욱 바쁘고 힘들어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주리에게 복사 심부름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은근슬쩍 담배나 커피심부름까지 더해지며 그녀의 몸과 마음을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꾹 참고 직원들의 온갖 잔심부름을 기꺼이 해주었다. 그녀라고 시시콜콜한 잔심부름까지 하고 싶었을까?

누구의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으로 인하여 업무의 공백이 생기는 것은 원치않았고 그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점심도 먹지 못한채 자신에게 주어진 잔심부름을 모두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시선 뿐이었다.

그녀를 향해 따뜻한 위로는 못해줄 망정 동료 계약직 사원들은 오히려 쓸데없는 일을 한다며 화를 내고 다그친 것이다. 물론 그녀들의 심경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다. 정주리로 인하여 같은 계약직인 자신들의 자존심마저 덩달아 짓밟히고 상처받는다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정주리로서는 자존심을 챙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직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주어진 모든 업무를 무조건 해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주리는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인격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언제 짤릴지 모른다는 압박감은 그녀를 달콤하고 위험한 유혹에 쉽게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미스김은 또다시 위기에 처한 회사를 위해 몰래 면접을 보러간 정주리를 찾아나섰다.

복사기를 고장내 상사에게 찍혀버리고 동료 계약직들에게도 비난을 받게되어 사면초가에 빠져버린 정주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친구가 권유한 다단계회사로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끝내 자신의 자존심마저 져버린채 뚜렷한 목표도 없이 방황하는 그녀를 향해 미스김은 쪽팔린줄 알라며 일침을 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행동인지 잘 알고 있었던 정주리는 미스김을 향해 절규하며 속마음을 하나도 남김없이 끄집어 내었다.

언제나 미스김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움츠려들기에 바빴던 정주리였지만 자신의 치부가 탄로난 순간 억눌렸던 모든 감정들이 한순간 폭발해 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정주리의 절규와 외침은 너무나 아팠다.

쪽팔린줄 알라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미스김에게 쪽좀 팔고 자신도 다이아몬드가 되면 안되느냐며 외치는 그녀가 너무나 아프게만 느껴졌다.

정규직의 자리를 보란듯이 과감하게 포기하며 상사의 면전에서 당당히 노예 운운했던 미스김을 지켜본 정주리는 그런 노예의 자리조차 앉아보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초라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마치 벌레보듯 경멸하고 있는 미스김이 너무나 미웠다.


하지만 그런 정주리를 바라보는 미스김의 마음 또한 편치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보다 더욱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정주리의 마음을 미스김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지난 세월동안 자신 역시도 그런 시간들을 몸소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도 초보계약직 시절에는 정주리만큼 사고도 많이 치고 혼도 났으며 때로는 사기까지 당해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미스김은 지금의 정주리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워냈다. 한번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미스김은 자신이 회사와 계약한 그 기간동안 만큼은 절대로 한눈을 팔거나 도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채 방황하고 있는 정주리를 향해 쪽팔린 줄 알라며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스김은 정주리에게 그런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언급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나마 자신이 겪어왔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더라면 그녀가 하루라도 빨리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테지만, 누구의 가르침이 아닌 스스로 부딪치고 깨달아야만 생존할 수 있다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스김은 그저 조용히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돌아서는 미스김의 뒷모습은 너무나 힘겨워보였다. 비단 몸살 감기 때문만이 아니라 문득 자신의 지난 과거의 모습을 정주리를 통해 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비춰졌던 미스김이 정주리를 뒤로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며 잠시나마 눈물을 훔치는 듯한 장면은 정주리의 절규보다 더욱 가슴아프게 느껴지기만 했다.


지나간 시간들이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기에 앞만 보며 거침없이 달려왔던 미스김도 이제는 몸과 마음을 편히 기대어 쉴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해 보인다. 비록 그녀의 안식처가 무정한이 아닌 장규직이 될지라도 지친 마음을 달래고 보듬어 줄 그 누군가가 미스김에게는 너무나 절실하다. 애써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편히 기대고 밝게 웃을 수 있도록 좋은 사람이 그녀 곁에 다가와 주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인용을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출처 : KBS2 직장의 신>

Posted by 믹스라임